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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59_페인트_현대 건축물의 색채(211.106.197.122)
작성자 Gemma 작성일 24-09-24 22:29 조회 28

산성의 부산고구려$ 도시 울산(1)​1.산성은 적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하여 산의 정상부나 사면을 이용해 쌓은 성이다. 산성은 높은 지형에 위치하기에 방어하기가 유리하며, 산을 끼고 지은 성이기 때문에 공성 병기의 사용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높은 방어력을 제공한다. 산의 경사와 높이는 그대로 공격군에게 상당한 부담 요소이다. 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전란을 당했을 때는 산성이 효율적이라면서 적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산성을 쌓아야 한다고 했다.(12권 공전(工典) 제4조 수성(修城))​산성은 장점 못지않게 단점도 많다. 주로 험준한 산세에 지어졌기 때문에 평시에 교통행정의 중심지로 삼기에는 여러모로 적합하지 부산고구려$ 않다. 이 때문에 평지성을 수도로 삼고 적침을 받으면 가까운 산성으로 가서 농성하는 전법을 즐겨 사용했다. 예를 들면 고구려는 평소에 국내성, 전시에 환도성을 사용했고 신라는 평소에 경주 월성 전시에 명활산성, 조선은 평소에 한양도성, 전시에 남한산성을 이용하는 식이다. 산성은 지형상 식량과 물이 떨어지면 치명적이라서 위치선정이 매우 중요하다. 산성 방어력의 핵심은 치장물자에 있다. 다음의 기록은 이를 잘 보여준다. ‘왜장들이 늘 논의하기를, 만일 아주 궁벽한 곳에 성곽을 튼튼하게 짓고 식량을 쌓아두고 청야 작전으로 막는다면 들에는 노략질할 것이 없고 부산고구려$ 뒤로는 군량의 공급이 계속 이어지지 않아서 점령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로서는 큰 걱정이 아닐 수 없다.(『선조실록』권88, 선조 30년 5월 18일)’​성곽은 거대 건축물로써 한번 축성되었다고 하면 완전히 철거되기가 쉽지 않다. 애초에 처음 만들어질 때 고려된 지정학적 요소는 근대 이전까지는 큰 변화가 없었기 때문에 특정 시기에 만들어지더라도 그 후대에 다시 사용되는 경우가 꽤 많다. 예를 들어 공주의 공산성은 백제의 산성으로 생각되지만, 조선시대에도 활용되었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고려시대의 산성이라고 하더라도 그 후대인 조선시대에 다시 사용되었던 것일 수도 부산고구려$ 있고 그 이전인 삼국시대나 남북국시대에 만들어진 것을 재활용해서 만든 것일 수도 있다. 산성은 축성하기도 어렵지만, 유지·보수하기도 쉽지 않다. 산성의 축성과 유지·보수에는 많은 사람들의 고난이 뒤따른다.2.우리나라는 산성의 나라라고 불릴 만큼 산성이 많은 나라이다. 우리나라 산성은 특히 삼국시대에 많이 축조되었다. 산성은 평상시에 창고를 두고 여기에 곡식과 무기를 준비하여 두며, 적이 침입하여 오면 평지의 주민들은 모두 들어오게 하여 농성하는 곳이다. 산성은 크기가 아주 작은 둘레 100m 이하의 것으로부터 둘레가 10㎞가 넘는 대형도 있다. 규모가 큰 산성은 성안에 부산고구려$ 얼마간 거주할 수 있는 주거지가 있었는데, 일반적으로 성안에 우물이나 계곡의 물이 있어야 하고, 창고시설이 있었다. 산성은 산의 경사면을 이용하거나 천험(天險)의 절벽을 이용하므로 쌓는 데 공력이 적게 소요되었다. 역사상 유명한 산성으로 고구려의 안시성·환도성, 신라의 삼년산성, 백제의 북한산성이 있다. 고려시대 몽고의 침략 때도 산성을 중심으로 항쟁하였고, 조선시대에도 서울 근처의 북한산성과 남한산성이 계속 중요하게 여겨졌다. 현재 중부 이남의 지역에만 1,200여 개 이상의 산성 터가 남아있다.왜가 경주로 들어오는 대표적인 길은 경주-울산-동래(부산) 또는 경주-언양-양산일 것이다. 『삼국사기』 3권, 자비왕 6년(463) 부산고구려$ 2월 기록에 ‘왜인이 삽량성에 침입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왜인들이 자주 영토를 침입하였으므로 변경에 두 성(城)을 쌓았다’라는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 여기서 삽량성은 지금의 양산시 일원이다. 현재 낙동강과 마주하고 있는 양산의 시가지 일원을 중심으로 북쪽과 남쪽 일원의 구릉지에는 고장성·마고성·북부동 산성·성황산성 등 신라~통일신라에 걸쳐 조성한 4개의 성(城)이 있는데, 이 중 2개가 당시에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즉 신라는 400년대 중반을 전후하여 동해와 마주하며 경주로 들어오는 주요 경로에 성(城)을 본격적으로 쌓기 시작한 것이다.​현재까지 조사된 자료를 바탕으로 경주 인근 부산고구려$ 지역에 잔존하고 있는 신라성을 살펴보면, 50개소 정도이며, 그중 경주로 크게 열린 길 주변에 놓인 신라성은 대략 30개소에 이른다. 이 중 주목되는 것은 양산 읍내를 중심으로 밀집한 4개 성과 울산 학성산(신두산)의 계변성으로부터 기박산성과 관문성으로 이어진 2∼3중의 방어선이다. 이는 그만큼 왜적이 집중적으로 양산과 울산의 강 입구로 침범해 왔음을 보여준다. 특히 울산은 지리적으로 일본과 가까운 데다가 신라시대에는 경주로 가는 관문으로서, 그 이후에는 한양으로 가는 길목이어서 일본으로부터의 침입이 유난히 많았다. 신라 성덕왕 21년(722)에 울산 범서에서부터 동쪽으로 산 능선을 부산고구려$ 따라 경주 외동까지 관문성을 쌓은 까닭도 여기에 있다.​울산광역시 울주군 온양읍 운화리 산159-6번지에 자리한 운화리산성은 신라의 대왜 관계의 틀 속에 보면, 이 성이 매우 중요한 길의 절점(切點, 가장 중요하고 중심이 되는 위치)에 자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남북으로는 동래와 울산이 통하는 길을, 동서로는 서생-웅촌-언양을 잇는 길을 관장하고 있으며, 신라 때 이 지역의 명칭인 생서량군(生西良郡)을 다스린 치소성이기도 하다. 이처럼 절점을 지키며 치소성의 기능을 하였던 것은 인접한 갑화량곡현(甲火良谷縣, 현재 기장군)의 기장산성, 거칠산군(居柒山郡, 현재 동래)의 배산산성, 우화현(亏火縣)의 우불산성, 부산고구려$ 거지화현(居知火縣)의 천전리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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